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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혼 백업/글 백업

[오키긴] Prison Break

by 갈로파 2015. 8. 12.


Prison Break






꿈을 꾸었다. 기억 저편에 넘어갔던 그 기억들이 또다시 잔상을 타고 돌아왔다. 질척하게 발밑을 적시는 피웅덩이가 꿈틀거리며 한 쪽 다리를 완전히 감아버리고 끌어당겼다. 웅덩이에서 마치 손이 튀어나와 잡아당기는 것같은 소름끼치는 감각에 재빨리 들고 있던 검으로 잘라냈다. 근육섬유를 끊어내는 듯한 감각에 젠장, 입술을 짓씹으며 도망쳤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 걸음씩 움직일때마다 철퍽거리며 적셔와 갈 수록 걸음이 무거워졌다. 발을 중심으로 덩어리 덩어리 뭉쳐지는 것만 같았다. 한 발 내딛는 것이 힘겨웠지만 그래도 긴토키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만 나아갔다. 아니, 도망쳤다.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 같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랬다.







'…긴토키.'







─아아. 멈춰선 그 자리에서 발을 붙잡는건 피웅덩이도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도 아닌,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목소리였다. 이건 꿈이야. 나도 알아. 늘 그랬듯 … 그러나 또다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알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늘 그랬듯… 목에 붉은 줄이 주욱 그어진채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긴토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 사람의 입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낮게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긴토키는 묻고 싶었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거냐고 묻고싶었다. 원망하는거야? 난 정말 노력했어. 노력했다고……소리가 되지 못한 변명들을 삼키며 긴토키는 느리게 발걸음을 떼었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그 사람이 어서 오라는듯 두 팔을 벌렸다. 긴토키는 저 품에 안기면 그대로 제 목을 조여올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다섯 걸음도 채 안 됐을때, 긴토키는 그 사람의 얼굴이 태양 아래 밀랍인형 마냥 녹아내리는걸 보았다. 끈적한 붉은 액체가 전신을 뒤덮었지만 이내 말끔이 사라져버렸다. 낯익은 얼굴이 고개를 들자 긴토키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자주 꾸는 악몽이라 쓸데 없이 익숙한 꿈이었건만─,




'형씨, 거기서 뭐해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







완전 다른데, 이리저리 꼬인 성깔에 건방지고 버릇없는 꼬맹이일 뿐인데 말이지.





"형씨. 얻어먹는 주제에 그 표정은 뭡니까?"





오키타는 단팥이 잔뜩 올라가 그 맛을 짐작할 수 없는 ─ 사실 짐작하고 싶지도 않은 ─ '밥'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삼키는 긴토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먹었다면서 밥 사달라고 한참 어린 저에게 하도 징징대서 ─ "술냄새가 진동하는데요?" "우리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자고- 아, 빈 속에 술 들어가서 죽을 것 같아……" ─  근처 가게에 들어갔더니 아예 대놓고 술까지 시켜버린다.


술 사준다고는 안 했는데요. 뻔뻔한 낯짝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히지카타 스폐셜 못지 않은 비주얼의 덮밥이 나왔음에도 곧바로 술병을 들고 통째로 빈 속에 들이부었다.


아니, 이 인간이 빈 속에 술쳐먹고 속 쓰리다며 밥 사달라고 졸라댈 땐 언제고 또 술을 쳐먹는거야. 남들 어이없어 하는 표정만 보다가 누구 덕에 어이없어 하는 오키타의 표정을 보면 분명 낄낄 비웃었을텐데 긴토키는 크으- 술병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대충 닦아내고,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그제서야 덮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내려놓으며 술 한 병 더 주문하는게 아닌가.




"뭡니까?"



"뭐가."



"드디어 입맛이 돌아온겁니까? 설마 히지카타 스폐셜을 먹고 싶은건가요, 형씨?"



"개밥은 안 먹어."



"어라, 원하신다면 기꺼이 사드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싱긋 웃는 모습 뒤에 숨겨진 사악함을 뻔히 알면서도 긴토키는 그 웃음기 어린 얼굴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버렸다. 가뜩이나 뭐하나 제대로 먹은 게 없는 위장에 술만 집어넣으니 속이 쓰리다못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덩달아 머릿속도.


닮았어. 

쓸데없이.


오키타는 이상함을 느낀건지 제가 시켜놓은 정식이 식어가는데도 긴토키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 옆이 따끔거리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고 있음에도 일부로 먹는데만 집중하던 긴토키는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삼켰다. 물 한 잔 호쾌하게 원샷한 긴토키는 탕 소리나게 컵을 내려놓으며 오키타를 노려봤다.




"그만 봐."



"싫은데요."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긴토키의 한 쪽 눈썹이 씰룩 올라갔다 내려왔다. 무슨 문제라도?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예 긴토키를 향해 턱을 괴고 있는 오키타였다. 시켜놓고 왜 하나도 안 먹냐, 긴토키는 오키타의 완전히 식어버린 밥을 젓가락 끝으로 쿡쿡 찔러대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면서 제 쪽으로는 단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키타는 술냄새 풀풀 풍기는 주정뱅이면서 실수로라도 저를 바라보지 않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형씨."


"왜?"


"저한테 뭐 할 말 있습니까?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눈치보지 마시고 말해보시죠."




개, 개새  이자식이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긴토키는 정말 말하는 거 어디 하나 닮은데 없는 건방진 꼬맹이의 뒷통수를 한 대 갈겨버릴 생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가, 차마 그러진 못하고 대신 제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오키타는 힐끗힐끗 움직이다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 우스운 몰골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배고프다며 능청스레 끌고 갈 땐 언제고 안 어울리는 짓인지.




"신종 떼쓰기 입니까?"



"아앙?"



"이 늦은 시간에 단 거 사달라고 시위하는거 아니면 부탁이니까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아주시죠. 썩 보기 좋진 않아서."





다 먹었으면 일어나죠? 다 먹지도 않았으면서 먼저 나가버리는 오키타의 기분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다는건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젠장. 긴토키는 스스로도 한심스러웠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사자 앞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 이걸 …말 한 마디 안 해주면서 곁눈질이나 하고, 그렇다고 똑바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화 났을까? 화났겠지?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뒤따라나갔지만 오키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가버렸나. 긴토키는 가게 문 앞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새 어딜간건지 머리털 하나 안 보이자, 가슴 구석이 쿡 쑤시는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 일은 원하는 대로 되는게 없지? 잊어버릴려고 술을 마신건데, 오히려 쓸데없이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닮아서 그래, 닮아서. 괜히 이상하게 연상되가지고 말이야, 앙? 이 나이 먹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라냐……겨우 겉모습에 휘딱휘딱 해가지고. 한심하게. 완전 다른데, 이리저리 꼬인 성깔에 건방지고 버릇없는 꼬맹이일 뿐인데 말이지.


 잊어버리자고 생각할 수록, 그럴려고 술을 들이킬 수록 자꾸만 선명하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모습에 목이 꽉 막히는 기분이다. 보는 앞에서 놓쳐버린 그 사람을. 무력하게 떠나보냈던 그 사람을. 그리고 내 손으로 ……


긴토키는 문득 손을 내려봤다. 붉은 피가 축축하게 손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손을 뒤집자 주르륵 끈적하게 흘러내리며 추락한다.


추락했다.


소름끼치게 붉은 흔적을 남기며, 

끝없이, 추락한다.




어이, 내가 잘못했어.


긴토키의 입꼬리가 반쯤 올라간 채 일그러졌다. 환각이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쓸데없는 허상일 뿐이다. 익숙하다고, 이런거. 그러니까 사라져버려. 사라져버리라고. 사라져. 긴토키는 손바닥을 마구 비벼댔지만 양 손 모두 피에 젖어버릴 뿐이었다. 지겹도록 봤던건데도 긴토키는 비위가 확 상해 두어번 헛구역질을 했다. 휘청이다 등뒤에 딱딱한 벽이 닿자 그대로 힘없이 주저 앉았다. 긴토키는 붉어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역시 술을 너무 많이 마신거라니까. 자제해야지, 그래. 그러니까, 누가 제발 이 시뻘건 것들 좀 치워봐.


이 환각 속에서 나를 꺼내줘.





그 순간 목에 냉기가 느껴졌다.




"형씨, 거기서 뭐해요?"



"…어?"



"뭘 그리 놀라요?"




긴토키는 피부에 닿는 차가움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을 뿌옇게 덮고있던 핏빛 안개가 걷혔다. 바닥에 고여있던 핏물은 사라지고 시커멓기만 했던 주변은 어슴푸레 가로등 불빛들이 피어나며 검푸른 하늘엔 소소한 별들과 달 하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짧은 탄성에 오키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는 분홍색의 캔을 들고 있었다. 긴토키는 멍하니 오키타를 바라보다 오키타가 캔으로 뺨을 툭툭 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하? 뭐야? 뭐야 방금?"



"마땅히 단 걸 구하기 어려워서요."





코코아입니다. 자판기까지 다녀왔다구요. 그제서야 긴토키는 오키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는 것과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고 해도 훅훅 숨을 내뱉느라 어깨와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리는걸 발견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골목 밖에 있는 자판기까지 가서 이걸 뽑아왔다니. 긴토키는 안 받고 뭐하냐며 손에 쥐어주는 캔을 받아들었다. 분홍색에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코코아 캔을 바라보던 긴토키는 갑자기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불퉁한 표정이면서도 주저앉아있는 긴토키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쪼끄만게 힘은 꽤나 세서 건장한 성인 남성 한 명을 단단히 부축하다니. 술 마셨을 때 단 게 좋다고 하던데, 얼른 다 마시고 갖다 버려요. 툭 던지는 오키타의 말에 긴토키는 결국 크게 소리내어 웃어댔다. 평소 성격 같으면 갖다 버릴 줄 알았는데 뛰어서 코코아까지 사오다니, 이거 너무 ……





"소이치로군, 생각보다 듬직한데? 푸하핫-!"





좀 가만히 있어봐요. 오키타는 투덜대면서도 긴토키가 정신없이 웃어대는 얼굴을 힐끗거렸다. 기분이 좀 풀린건가. 오키타는 안 어울리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긴토키가 내심 신경쓰였다. 어딘가 위태롭게 보였지만 뭐가 문제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나마 유일하게 생각한 방법이 '단 걸 먹이자' 였다. '그' 덮밥으로도 기분이 나아보이긴 커녕 술이나 들이 붓고 있으니 보다못해 오키타는 먼저 가게를 나서 뭔가 달달한 디저트라도 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열고 있는 가게들은 없었고, 그나마 제일 가까운게 음료 자판기였다. 그 중 코코아가 있었다는걸 기억해낸 오키타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최대한 빨리 사온다고 한건데 그새 긴토키는 가게 밖에 나와있었다. 그것도 구석에 만취한 취객처럼 벽에 기대서. 다만 주정뱅이의 흔한 주정이라고 보기엔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는 그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어도 가슴 아려와서, 오키타는 일부로 모르는척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다. 


오늘 그는 좀 이상했으니까.





"형씨."


"왜?"


"뭔지는 말 안 해줄겁니까?"


"응? 뭐를?"


"오늘 좀 이상했다고요, 형씨 상태."


"아아, 그거……"




해결사 사무실 현관까지 몸소 바래다 주고 헤어지기 직전, 오키타가 물어왔다. 긴토키는 그리 밝지는 않은 불빛 아래 서있는 오키타를 말 없이 바라보다 턱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어린애처럼 머리를 쓰다듬나 싶더니 천천히 내려와 오키타의 얼굴을 손끝으로 살짝 훑으며 지나갔다. 오키타는 묘하게 애틋한 그 움직임에 움찔 하며 눈이 감겼다. 눈을 감자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척추가 오싹오싹했다. 아직 한창 팔팔한 청년에게 이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손길은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건가. 


그리고 눈을 떠 마주한 긴토키의 눈은 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흐릿한 초점으로 바라보고있었다. 살짝살짝 닿는 부분마다 짜릿짜릿 전기가 오르는 것만 같던 기분이 그대로 바닥에 차갑게 추락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툭, 힘없이 떨어지는 손과 긴토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오키타는 잘자라며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휘적휘적 해결사 사무실로 들어가버리는 긴토키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 없이 물었다.





─나에게서 누굴 보는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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