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_01
이 새카맣고 끈적이는 건 볼 때마다 생각하는거지만, 도저히 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나 잔인해지는걸까.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이는데, 어느새 이렇게 시체라하기도 어려운…
"히지카타, 또 쓰레기랑 대화하냐?"
"내버려둬. 처음엔 한동안 저래."
"어이, 그깟 요괴 동정하단 목숨줄이 달랑달랑해. 적당히 하고 그만 가라고, 신참."
…쓰레기.
우린 이것을 쓰레기라 부른다. 여기저기 찢겨지고 결국 불타버린 시커먼 덩어리들. 히지카타는 팔에 친친 감긴 붕대의 끝을 손끝으로 비볐다. 요괴를 관통하고 있던 쇠꼬챙이에 엉겨붙은 시커먼 덩어리들이, 정말로 얼마전까지 미쳐날뛰던 그 요괴의 몸속을 힘차게 돌며 그토록 날카로운 움직이게 내게 했던걸까. 요괴의 손톱에 찢긴 팔뚝은 해독을 하고 약초를 붙여 피는 멎어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자꾸만 불에 데인 양 욱씬거렸다.
히지카타는 동료들을 흘끗 바라봤다. 뺨에 약초를 짓이겨 붙인 사람도 있었고 다리에, 몸에 붙인 이들도 많았지만 다들 익숙한 듯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다. 히지카타는 그에 비해 상처가 적은 제 몸을 내려봤다. 가시덤불에 긁힌 애꿏은 상처를 건드리니 빨간 핏방울이 작게 맺혔다. 히지카타는 작게 숨을 내쉬며 미간과 눈두덩을 살살 문질렀다. 붙잡혔을 당시 자신을 노려보던 시뻘건 눈빛이 어째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다. 화살에 터져버린 한 쪽 눈을 감은 채 원독 가득한 눈으로 노려봤었다.
─지금은 처참한 꼴로 남았지만.
히지카타는 주변에 널브러진 주먹보다 조금 작은 돌들을 모아왔다.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요괴의 시체 앞에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올렸다. 당연한 일을 한건데. 가슴이 답답했다. 돌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가슴이 자꾸만 묵직하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히지카타씨,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까?"
소고가 어느새 뒤에 다가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히지카타보다 훨씬 어린데도 이런 '처형식' 을 미동 조차 없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욕지기가 치밀어 헛구역질하던 사람들 속에서도 덤덤히 서있던 소고였다. 심지어 총명하고 몸도 날래서 조금 더 자라면 유능한 '사냥꾼'가 될거라며 동네 어르신들이 기대하고 있는 기대주였다. 보통 처형식이 끝나면 제 집으로 돌아가더니 어쩐일인지 오늘은 이시간대 홀로 여기까지 나와있었다.
"벌써 시간이 늦었다구요."
"그래. 그만 가볼까."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쪽으로 돌아가려는데 소고는 여전히 그자리에 서있었다. 너는 왜 거기있는거냐고 물으니, 신경끄고 먼저 가라며 귀찮다는듯 손을 내젔는다. 건방진 태도에 히지카타는 아주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더 묻지 않고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나왔건만, 막상 마을 불빛이 어른거리는걸 보니 슬쩍 걱정이 삐쭉 올라왔다. 이렇게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은 요괴가 나타난다해서 마을 밖으로는 잘 가지 않는데, 괜찮으려나.
젠장. 히지카타는 뒷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괴상한 신음성을 내더니 결국 도로 처형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해가 기울며 하늘이 전부 핏빛으로 물들어가는게 어쩐지 소름끼쳐서 걸음을 빨리했다. 여기저기 말뚝들과 흩어진 돌무더기들이 을씨년스러운 처형장은 공기조차도 숨막혔다. 검은 핏물이 길게 늘어진 끝에, 소고가 서있었다.
부르지 못했다.
소고는 눈을 감고 한 손을 허공에 내밀고 있었다. 다른 손은 가슴팍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보이지는 않지만 히지카타는 소고의 주위에서 기이한 힘을 느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으나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소고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는 순간, 숨이 콱 막혀 히지카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가 쌓아놓은 작은 돌산 위에 놓여진 새하얀 꽃 하나가 불타올랐다. 그 마저도 소리없이 고요한 가운데 소고의 중얼거림만이 남았다.
꽃잎은 전부 불타고 가느다란 줄기가 타오르자 이내 역한 냄새가 났다. 헛구역질이 나오려했다. 다행히 고약한 악취는 금방 사라져버리고 새하얀 꽃은 완전히 불타 재가 되어 날아갔다. 사르르 흩날리는 게 싸락눈 같았다. 소고가 조용히 손을 내리자 꽉 막힌 것 같았던 기도가 탁 트이는 기분에 히지카타는 커흑, 숨을 토하였고 그때문에 소고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히지카타네."
"누구씨, 는 어디갔냐."
"거기서 뭐해요?"
"너야말로. 뭐하는거야?"
"뭐어- 불장난이랄까요."
소고는 소매에서 하얀 꽃을 꺼내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인줄 알았는데 종이였다. 종이꽃을 태우고 있던건가? 아무리봐도 평범한 종이꽃인데……. 의심스럽다는 표정에 소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만 달라며 종이꽃을 낚아챘다. 뺏기지 않으려고 붙잡았지만 실패하고, 그 대신 종이꽃잎 하나가 반쯤 찢어서 덜렁였으며 동시에 히지카타는 손끝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아까 상처를 일부로 벌려서 피를 봤을 때와는 달리 꽤나 달갑지 않은 불쾌감이였다. 송글송글 새어나오는 핏방울과 덩달아 오는 쓰라림에 인상을 팍 쓰며 짜증내려 했었다. 그러나 찢어진 종이꽃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소고에게 차마 히지카타는 제 손이 베였다고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미안하다."
"됐으니 신경끄시고 죽어, 히지카타."
어라, 마지막은 실례. 소고가 찢어진 종이꽃을 히지카타의 얼굴에 착 붙이더니 ─ 느낌상 집어던짐과 붙임의 중간정도였다 ─ 누가봐도 고의임이 분명하게 어깨를 세게 부딪히며 가버렸다. 거기 오늘 부상 입어서 엄청 아프다고는 한 마디도 못해본 채, 히지카타는 곧 팔랑이며 바닥에 떨어지는 종이꽃을 집었다. 손끝에 베인 상처에서 방울지던 붉은 피가 종이에 번졌다. 하얀 꽃이 붉게 얼룩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은 히지카타는 자신이 쌓은 돌무더기 옆에 처음보는 싱싱한 들꽃다발이 놓여있는걸 발견했다. 막연히 소고가 가져왔나보다, 생각하던 찰나, 히지카타는 고개를 번쩍 들어 소고가 지나간 곳을 바라봤다.
아까 봤을 때부터, 소고는 아무것도 들고있지 않았는데. 숨겼다 꺼냈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어디 뭉개진곳 하나 없는 싱그러운 들꽃다발에 히지카타는 더욱 의심을 갖고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마땅한 소득은 없었다. 크기는 작아도 노랗고 파랗고 빨간 꽃들을 바라보다 말없이 일어난 히지카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고가 놓고간 횃불의 빛이 닿는 곳에는 꽃한송이 없었다. 히지카타는 주머니를 뒤집어 구겨진 종이꽃을 조심스레 펼쳤다. 피가 묻어 한쪽은 젖고 다른쪽은 찢어져있었지만 히지카타는 세심한 손길로 최대한 구김을 펴 들꽃다발 옆에 놓았다. 날아가지 말라고 작은 돌을 그 위에 올려놓기까지 한 히지카타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곤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조용히 그렇게 처형장을 벗어났다.
히지카타가 떠난 후, 홀로 타고있던 횃불 위로 물에 푹 젖은 이파리들이 후두둑 떨어지며 처형장에 어둠이 깔렸다. 달빛만이 음울하게 남은 그곳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달모다도 처연한 은빛을 가진 그는 마을쪽으로 가는 길을 힐끗이더니 몸을 숙여 작은 돌을 치웠고, 주름진데다가 찢어지고 피얼룩이 남은 종이꽃을 집어들었다. 흙을 대강 툭툭 털어낸 뒤 잠시 킁킁 냄새를 맡아보다 그대로 낼름 입안에 넣고 꿀꺽 삼켜버렸다. 요사스런 붉은 혀가 입가를 훔쳤다.
"…나쁘지 않네."
입꼬리를 살짝 당기며 웃더니 천천히 움직여 검은 덩어리가 말라붙은 쇠꼬챙이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곳에 서있던 그는 쇠꼬챙이를 툭 쳤다. 그리고 나즈막히 어둠속을 울리는 목소리만이 남았다. 잘가. 나무들이 몸을 털어내는 듯 사르르 부딪히는 잎새들의 떨림이 정적을 메웠다.
#
아주 오래전, 우리는 하나였다.
---------------------------------------
'은혼 백업 > 글 백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지긴] 장막 (To. 가란님) (0) | 2015.12.22 |
---|---|
[긴카구/카구긴] 비상 (0) | 2015.11.03 |
약속 _00 (prologue) (0) | 2015.11.01 |
[오키긴] Prison Break (0) | 2015.08.12 |
암연. (0) | 2015.07.30 |